질문등록
herim3038 2021-01-02 오후 10:00:04

1.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두려움에 떨며 행복에 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행복의 실현을 위해 이러한 두려움을 자연학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이신론적 관점과 원자의 우연적인 운동을 통해 우주의 필연성을 부정함으로써 행복이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 실현된다고 보았다. 또한 영혼이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며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후 심판을 부정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였다. 그는 인간 스스로가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하고 이를 쾌락주의적 윤리학을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2.

첨단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제로 남겨져 있는 생명체의 존재 이유와 원리는 자연물의 구성요소를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물질론과 이에서 파생된 환원론을 부정하면서, 모든 자연물은 목적 지향적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물이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내재적 본성과 이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타고났으며, 이는 반드시 실현되어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3.

비트켄슈타인은 철학적 논란의 원인으로 언어의 명확하지 못한 사용을 지적하고 이를 그림 이론을 통해 명료화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언어와 세계가 대응하는 것처럼 각각을 구성하는 명제와 사태 또한 대응한다고 보았다. 그는 언어가 세계에 실재하는 것들을 지시하기에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이, 의미 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사태와 대응하여 경험적 세계에 다루고 있으며 진위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의 감각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것들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던 기존의 철학적 논란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명제가 되므로 의미 없는 말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4.

신채호는 조선 민족을 이루는 역사적 주체의식과 제국주의에 대응하여 생긴 국가정신과의 조화를 이룬 신국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조선민족이 신국민이 될 때 민족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대항하는 동양주의는 조선 민족의 주체적 생존이 어렵다고 보며, 조선 민족 중 일본과 동화되지 않는 자들과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일본 민중과 연대하여 서구 열강에 대해 투쟁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 민중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속에서 일본과 이에 동화된 자들이 휘두르는 정당하지 못한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며 인류가 인류를 억압하지 않는 자유 속에서 서구열강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5. 율곡은 만물을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인 이와 끊임없이 변동하는 물질인 기와의 조화를 통해 만물을 설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전개된 수기를 위한 수양론 중 하나인 이통기국은, 천도와 합일되는 경지에 도달한 성인과 일반인의 기질에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이를 갖기 때문에 일반인 또한 수양을 통해 기질을 변화시키면 천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을 넘어 사회의 폐단을 제거하여 천도를 실현하려는 경세론과도 이어지는데, 이이는 이를 통해 이인 왕도 즉 어진 정치를 위해 기인 법제의 변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법제개혁론을 통해 이인 대전 즉 조종 성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폐단이 있는 법령들을 고쳐야함을 주장하며 직접 수기치인을 실천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k00332 2021-01-02 오후 4:40:41
k00136_ 2021-01-02 오전 10:08:33
k00136_ 2021-01-02 오전 10:07:04
k00178 2021-01-01 오후 11:17:57

1.  고대그리스인들은 신에 의해 우주가 운행되는 결정론적 세계관 속에서 자연재해나 천체현상들을 두려워했고, 에피쿠로스 인간을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게 자연학을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주장하며 인간의 행복은 그 자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므로 사후의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원자들이 우연적인 운동을 하여 우주역시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했고 인간의 삶에서 신의 섭리는 없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고 쾌락주의적 윤리학을 바탕으로 행복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이 내재적 본성에 따라 운동을 한다는 목적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근대학자 갈릴레이, 베이컨, 스피노자에 의해 목적론이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서 볼로틴은 근대과학이 자연에 목적이 있음을 보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우드필드는 목적론의 옳고 그름을 확인 할 수 없다고 하며 목적론이 거짓이라는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물의 구성요소를 통해 그것의 본성을 모두 설명할 수 없으며 자연물의 본성이 단순히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17세기의 물질론과 환원론에 대해 부정했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물의 운동원리와 이유에 관한 탐구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3. 비트겐슈타인 여러 철학적 논란들을 없애기 위해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 명료화 하는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그는 모형으로 사건을 설명한다는 사실을 통해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가 동일하며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그림이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림이론에서 언어는 명제로, 세계는 사태로 구성되어있다고 보고 명제는 사태와 대응 된다고 하였으며 사태는 사실이 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어떤 명제가 의미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명제가 실재하는 사태에 대해 언급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참 거짓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경험적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명제만이 의미있다고 보았고 기존의 철학자들의  경험적이지 않은 대상에 관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4. 역사가 신채호는 투쟁과 연대를 지향하였고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아'를 정의 하였다. 그는 '아'가 항상을 통해 자신에 대해 자각하며, 변성을 통해 비아와의 관계속에서 자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아'를 소아 와 대아로 구분하였고 조선민중이 상속성과 보편성을 지닌 대아인 신국민이 되어 민족생존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종적으로 민중이 제국주의 나라인 비아 속의 아와의 연대를 통하여 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5. 율곡이이는 수기치인을 통해 천도에 도달한 사람이 '성인' 이라고 정의했고 조선 땅에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인 유학의 이상사회가 구현되기를 소망했다. 그는 이기혼을 통해 수기를 위한 수양론과 치인을 위한 경세론을 전개하고자 하였는데 수양론을 기반으로 이통기국론을 주장하면서 이 이론이 '이'의 본성회복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질변화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경세론으로서 볍제개혁론을 택하여 왕도와 오륜을 구현할 수 있도록 '기'에 속하는 법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단이 없고 영구히 시행될만한 것으로 판정된 규정들은 대전에 실리게 되고 양법미의라고 불린다. 그리고 오랜시행으로 검증되어 선왕들이 영원히 시행할 것으로 판정한 규범은 조종성헌이라고 불리는데 이이는 조종성헌을 번혁하려고 하지 않았고 조종성헌에 해당하지 않는 부당한 법령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 서양의학의 영향력이 크지 않던 18세기 당시 실학자 이익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만든 아담 샬의 '주제군징'의 일부를 채록하고 몸의 운동을 뇌가 주관하고, 지각활동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고수했다. 이익 이후에도 서양의학 지식의 내용 부족, 충격적이지 않는 내용, 윤리적 문제, 그리고 조정의 금지 조치로 서양의학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인체의 지각적, 생리적 기능에 주목한 실학자 최한기는 몸을 일종의 기계로 파악하는 '몸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하였고 홉슨의 '전체신론'을 접한뒤 그의 생각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인체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다고 보았고 신기를 신체운동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는 신기를 구체적으로 정의 하며 신기가 지각운동을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주장했고 신기를 통해 외부 정보를 받고 이를 조정하며 이로써 세계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

7. 동아시아 사회에서 오래 유지된 과거제는 공정성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위 획득의 기회를 주며 사회적 유동성을 증대시켰다. 또한, 과거제는 교육의 확대, 지식의 보급, 통치의 안정성 등에 기여를 했으며 서양세계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재능 낭비, 관리로써의 됨됨이 평가의 어려움, 신분적 세습의 문제등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형원의 공거제, 중국의 개혁론, 황종희의 벽소 등 과거제에 대한 여러 보완제도가 탄생했다. 여러 보완제도가 도입한 봉건적 요소들은 역설적 상황을 역사적 경험과 사상적 자원을 활용하여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8. 18세기 북학파들은 청에 다녀온 경험을 연행록으로 기록하여 청의 문물제도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을 구체화 했고 이 북학파에 속하는 박제가 이덕무의 북학론은 차이를 보였다. 박제가는 청의 문물이 주는 이익을 강조하며 조선이 중화와 합치되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명에 대한 의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청 문물의 효용을 강조했으나 그와 다르게 조선과 청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였다. 18세기 후반 중국은 여러 시장들의 연결과 은의 유입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증가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반란을 일으키는 조직이 성행하고 관료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청은 급속한 하락의 시대를 겪게 되었다.

k90502 2021-01-01 오후 6:39:18
k00130 2021-01-01 오후 6:04:30

[1]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에피쿠로스는 자연학을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했다. 에피쿠로스는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행복은 인간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영혼과 육체는 모두 입자로 구성되었으며 육체가 죽으면 영혼 또한 소멸하기에 사후 신에 의한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원자의 운동이 우연적인 것처럼 신 또한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며,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자유의지 실현에 매우 중요하다.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신의 필연성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중심으로 에피쿠로스는 윤리학을 이끌어간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며, 목적 실현은 항상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목적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갈릴레이, 베이컨, 스피노자는 각각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볼로틴, 우드필드는 다시 근거를 들며 목적론의 타당성에 대해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적 구성만으로 본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엠페도클레스를 반박하며 자연물이 단순히 물질적 구성이 아니며 본성이 단순히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현대에도 하고 있는 생명의 존재원리와 이유를 탐구하려는 노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3]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언어를 명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어가 세계에 대응하므로 '그림 이론'을 통해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의미 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해 직접 언급해야 하며, 그것이 참이어야한다. 만약 반대가 된다면 '의미 없는 명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 질문들은 모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4] 신채호는 오로지 투쟁만을 역설한 강경론자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사상에서 핵심인 '아'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투쟁과 연대가 모순되지 않는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와 '비아'는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아'의 자성은 항성과 변성으로 나뉘며 항성을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자각하고 변성을 통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신채호는 '아'를 다시 소아와 대아로 구별하였는데, 소아는 자성은 잊지만 상속성과 보편성을 가지지 못하는 반면 대아는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항성이 크고 변성이 작거나 항성이 작고 변성이 큰 경우 모두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아의 개념을 통해 동양주의에 반대하고 비아에 동화된 자들을 제외한 민중을 제국주의에 함께 저항할 수 있는 주체로 보았다.

[5] 율곡 이이는 '이'와 '기'를 바탕으로 한 '수기'와 '치인'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로, '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인 요소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만물은 하나의 같은 '이'를 공유하지만, 다양한 '기'의 성질로 인해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성인과 일반인은 동일한 '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질을 정화하면 선한 본성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율곡 이이는 법제 개혁론을 펼쳤는데, '이'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전과는 달리 법제는 '기'에 해당했기 때문에 성종 이후 연산군 때 만들어진 법령 중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는 법제를 개혁해야만 조종성헌이 회복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대전은 수교와 록을 거쳐 만들어지는데, 대전에 오른 규정들은 '이'의 영역에 해당하며 개정되지 않았다.

[6] 당시 의학자들도 관심없던 서양 의학에 이익은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아담 샬의 영향을 받아 몸의 운동은 뇌가 주관하며 지각 활동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전통적인 심주지각설을 주장하였따. 이후 최한기는 홉슨의 영향을 받아 이전 유학자들은 도덕적 차원에 초점을 두었다면, 그는 지각적, 생리적 기능에 주목하여 '몸기계'라는 인체관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체는 '신기'를 통해 신체 운동을 한다고 보며 뇌가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뇌주지각설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심'이 지각 운용을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주장했다. 심주지각설의 '심'은 심장이 아니라 신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며, 이러한 신기는 태어날때 만들어지며 죽을때 사라지는 유동성을 지니며, 균형을 이루어야 생명 활동과 지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최한기의 인체관은 서양 의학을 맹신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체계를 만들고자 했던 점에서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7] (가) 동아시아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과거제는 비교적 공정한 제도로 관료들을 선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거제는 학습에 강력한 동기를 주어 교육의 확대에 기여했고,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여러 특권을 주며 과한 경쟁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비록 왕조가 교체할지라도, 모두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동질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제의 장점을 알아본 유럽 국가들은 시험을 통한 경쟁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나) 유형원, 고염무, 황종희 등의 학자들은 학습 능력 외의 인성이나 실무 능력을 평가할 수 없는 등의 과거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론을 주장했다. 과거제의 부작용으로는 공동체 의식의 약화, 개인적 동기와 공공성의 상충, 결과주의적, 능력주의적 생각 등이 있었다. 따라서 봉건주의적 요소의 도입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합리적인 제도가 가지고 온 역설적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8] (가) 박제가와 이덕무를 통해 같은 북학론을 주장하더라도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청의 현실을 조선이 지향할 가치 기준으로 여기며 객관적이기보다는 특정 관점에서 서술한 박제가와 달리 이덕무는 객관적인 태도로 청의 현실을 서술하였다. 반대로 박제가와 이덕무는 청 문물의 효용을 인정하여 이익 추구를 인정하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으로 인해 경제적 번영을 했지만 19세기에 접어들자 인구 증가로 인한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였다. 이로 인해 사회적 유대가 약화된 사람들은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러한 결사조직은 반란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종종 불법적인 행위들도 나타났다. 통치자들은 이런 모습에 불안을 느끼며 외국과의 접촉을 차단하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청은 18세기 후반에 비로소 무역 개방이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k00387 2021-01-01 오후 5:57:50
  1. 에피쿠로스는 자연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했다그는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주장해 행복이 인간 자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았다또한 인간의 미세한 입자로 구성이 되기 때문에 사후에 소멸하여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우주가 우연적인 운동을 하는 원자로구성되었고 우주와 인간 세계에 신에 관여는 없기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는다고 주장했다에피쿠로스는 인간이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살아갈  있는 길을 제시하고 행복을 실현할 방법인 쾌락주의적 윤리학을 제시하였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이 목적을 추구하는 본성을 타고나며외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본성에 따른 운동을 한다는 목적론을 주장한다그의 주장은 인간 이외의 자연물도 이성을 갖는 것으로 의인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이러한 비판은 자연에 목적이 없을 보이지 못했고 시도조차 하지 않아 목적론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론과 환원론에 반대했다그의 목적론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생명체의 존재 원리와 이유를 정확히 규명하는 탐구의 출발점이다
  2. 비트겐슈타인은 많은 철학적 논란들이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해 발생한다고 보아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하여 명료화는 것을 중요시했다그는 그림 이론에서 언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언어가 세계와 대응하고 언어가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또한어떤 명제가 ‘의미 있는 명제 되기 위해서는 명제가 실재하는 대상이나사태에 대해 언급해야하며그것에 대해서는 거짓을 따질  있다고 주장한다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의철학자들이 다루었던 논의는 의미가 없으며 형이상헉적 문제와 관련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지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3.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 과정이라 정의하는 동시에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중 간의 연대를 지향하기도했다아란 자기 본위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주체이며 비아와 마주  주체를 의미하고 아의 자성은 항성과 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는 아를 소아와 대아로 구별하여 소아는 개인적 아로 상속성과 보편성을 갖지 못하며대아는국가와 사회 차원의 아로 상속성과 보편성을 가질  있다고 말한다또한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여 조선민족의 근대적 대아인 신국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서구 열강에 대항하자는 동양주의를 조선민족인 아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보아 반대했다신채호는 조선 민중을 참된 민족 생존과 번영을 달성할  있고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부당한 폭력과 억압을 강제하는 제국주의에 함께 저항할  있는 주체로 보았다
  4. 유학은 수기치인을 통해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으로율곡은 이기론을 바탕으로 수기를 위한 수양론과 치인을 위한경세론을 전개한다그는 수양론의  가지 기반으로만물이 하나의 동일한 ‘ 공유하지만 다양한 ‘ 성질로 인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있다는 이통기국을 주장하고이것은 기질 변화론으로기질 변화론은 경세론으로 이어진다또한율곡은 ‘ 구현할  있도록 법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반면, ‘대전이라는 법전은 여러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완성되고조종성헌이라 불리는데, <경국대전> 그런 절차를 거친 것으로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규정들이 개정되지 않았고국왕이라도 그것을 어길 수는 없었다따라서 율곡의 법제 개혁론은조종성헌을 변혁하자는 것이 아닌폐단이 있는 여러 법령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5. 17세기 초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은 사상의 변화를 이끌었지만 이에 대해 논평을 남인 인물은 제한적이었는데실학자 이익은 <서국의>에서 서양 의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수용하였지만 심주지각설을 고수하였다이익 이후에도 서양 의학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19세기 실학자 최한기는 인체의 지각생리적 기능에 주목해 문제의식을 본격화하였다최한기는 인체를 일종의 기계인 ‘몸기계 형상화하면서도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자발적인 운동을 한다고 보았는데그는 인체를 구성하는 신기를 신체운동의 원인으로 규정하여 기계적 운동의 인과 관계를 설명하려 했다그는 홉슨의 뇌주지각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것은 완전한 체계를 이루기에 불충분하다고 보아 심주지각설이  유용하다고 주장하였다또한그는 신기가 감각 기관을 통한지각 활동에 의해 외부 세계의 장보를 받아들여 기억으로 저장한다고 파악하였는데이러한 최한기의 인체관은 서양 의학을 맹신하지 않고 개념의 접합을 통해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조선 사상가에서 주목할 만한 성취이다
  6. (과거제는 능력주의적인 시험으로 시험 성적 자체가 더욱 중요해졌다이것은 응시 자격에 일부 제한이 있었다하더라도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사회적 유동성 역시 증대시켰다 결과 지식인 집단이 폭넓게 형성되었으며 도덕적인 가치 기준에 대한 광범위한 공유를 이끌어냈다과거제는 동질적인 엘리트층의 연속성을 가져와 사회적 안정에 기여했다장기간 유지된 과거제는 유럽에 전해져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사상적 동향과 실질적인 사회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제의 문제점에 따른 개혁론이 등장했다형식적 학습재능 낭비학습 능력 이외 부분 평가 불가능과 같은 문제로 과거제를 개선하라는 압력이 이어졌다또한과거제의 부작용에 따른 관리들의 활동의 한계가 드러났다봉건적 요소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소속감과 충성심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 (북학론에는 차이가 있었는데박제가톼 이덕무의 연행록에서도 이러한 차이를   있다박제가는 중화와 합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이덕마는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와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 18세기 후반 중국은 국내 교역이 활발히 일어났는데은과 상품의 세계적 순환으로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연결되었다그러나 청은 부정부패사회적 유대 약화상호 주조 관계를 맺는 결사 조직 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통치자들도 이를 느껴 무역 개방을 축소하고 일부 지식인들만이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