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에피쿠로스는 자연학을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했다. 에피쿠로스는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행복은 인간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영혼과 육체는 모두 입자로 구성되었으며 육체가 죽으면 영혼 또한 소멸하기에 사후 신에 의한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원자의 운동이 우연적인 것처럼 신 또한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며,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자유의지 실현에 매우 중요하다.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신의 필연성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중심으로 에피쿠로스는 윤리학을 이끌어간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며, 목적 실현은 항상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목적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갈릴레이, 베이컨, 스피노자는 각각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볼로틴, 우드필드는 다시 근거를 들며 목적론의 타당성에 대해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적 구성만으로 본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엠페도클레스를 반박하며 자연물이 단순히 물질적 구성이 아니며 본성이 단순히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현대에도 하고 있는 생명의 존재원리와 이유를 탐구하려는 노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3]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언어를 명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어가 세계에 대응하므로 '그림 이론'을 통해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의미 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해 직접 언급해야 하며, 그것이 참이어야한다. 만약 반대가 된다면 '의미 없는 명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 질문들은 모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4] 신채호는 오로지 투쟁만을 역설한 강경론자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사상에서 핵심인 '아'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투쟁과 연대가 모순되지 않는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와 '비아'는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아'의 자성은 항성과 변성으로 나뉘며 항성을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자각하고 변성을 통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신채호는 '아'를 다시 소아와 대아로 구별하였는데, 소아는 자성은 잊지만 상속성과 보편성을 가지지 못하는 반면 대아는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항성이 크고 변성이 작거나 항성이 작고 변성이 큰 경우 모두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아의 개념을 통해 동양주의에 반대하고 비아에 동화된 자들을 제외한 민중을 제국주의에 함께 저항할 수 있는 주체로 보았다.
[5] 율곡 이이는 '이'와 '기'를 바탕으로 한 '수기'와 '치인'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로, '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인 요소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만물은 하나의 같은 '이'를 공유하지만, 다양한 '기'의 성질로 인해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성인과 일반인은 동일한 '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질을 정화하면 선한 본성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율곡 이이는 법제 개혁론을 펼쳤는데, '이'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전과는 달리 법제는 '기'에 해당했기 때문에 성종 이후 연산군 때 만들어진 법령 중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는 법제를 개혁해야만 조종성헌이 회복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대전은 수교와 록을 거쳐 만들어지는데, 대전에 오른 규정들은 '이'의 영역에 해당하며 개정되지 않았다.
[6] 당시 의학자들도 관심없던 서양 의학에 이익은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아담 샬의 영향을 받아 몸의 운동은 뇌가 주관하며 지각 활동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전통적인 심주지각설을 주장하였따. 이후 최한기는 홉슨의 영향을 받아 이전 유학자들은 도덕적 차원에 초점을 두었다면, 그는 지각적, 생리적 기능에 주목하여 '몸기계'라는 인체관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체는 '신기'를 통해 신체 운동을 한다고 보며 뇌가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뇌주지각설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심'이 지각 운용을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주장했다. 심주지각설의 '심'은 심장이 아니라 신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며, 이러한 신기는 태어날때 만들어지며 죽을때 사라지는 유동성을 지니며, 균형을 이루어야 생명 활동과 지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최한기의 인체관은 서양 의학을 맹신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체계를 만들고자 했던 점에서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7] (가) 동아시아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과거제는 비교적 공정한 제도로 관료들을 선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거제는 학습에 강력한 동기를 주어 교육의 확대에 기여했고,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여러 특권을 주며 과한 경쟁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비록 왕조가 교체할지라도, 모두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동질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제의 장점을 알아본 유럽 국가들은 시험을 통한 경쟁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나) 유형원, 고염무, 황종희 등의 학자들은 학습 능력 외의 인성이나 실무 능력을 평가할 수 없는 등의 과거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론을 주장했다. 과거제의 부작용으로는 공동체 의식의 약화, 개인적 동기와 공공성의 상충, 결과주의적, 능력주의적 생각 등이 있었다. 따라서 봉건주의적 요소의 도입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합리적인 제도가 가지고 온 역설적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8] (가) 박제가와 이덕무를 통해 같은 북학론을 주장하더라도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청의 현실을 조선이 지향할 가치 기준으로 여기며 객관적이기보다는 특정 관점에서 서술한 박제가와 달리 이덕무는 객관적인 태도로 청의 현실을 서술하였다. 반대로 박제가와 이덕무는 청 문물의 효용을 인정하여 이익 추구를 인정하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으로 인해 경제적 번영을 했지만 19세기에 접어들자 인구 증가로 인한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였다. 이로 인해 사회적 유대가 약화된 사람들은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러한 결사조직은 반란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종종 불법적인 행위들도 나타났다. 통치자들은 이런 모습에 불안을 느끼며 외국과의 접촉을 차단하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청은 18세기 후반에 비로소 무역 개방이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